조니 에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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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니 에버스는 1881년 뉴욕주 트로이에서 태어난 미국의 야구 선수로, 주로 2루수로 활약했다. 1902년 시카고 컵스에서 데뷔하여 1917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으며, 1914년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에서 활약하며 리그 MVP를 수상했다. 컵스 시절 조 티커, 프랭크 찬스와 함께 뛰어난 수비 연계로 유명해졌으며, "Tinker to Evers to Chance"라는 구절로 널리 알려졌다. 은퇴 후에는 코치와 감독으로 활동했고, 1947년 사망했으며, 1946년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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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니 에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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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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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니 에버스 |
포지션 | 2루수 |
타격 | 좌투 |
투구 | 우투 |
출생일 | 1881년 7월 21일 |
출생지 | 미국 뉴욕주 트로이 |
사망일 | 1947년 3월 28일 |
사망지 | 미국 뉴욕주 올버니 |
선수 경력 | |
데뷔 리그 | MLB |
데뷔일 | 1902년 9월 1일 |
데뷔 팀 | 시카고 오펀스 |
최종 리그 | MLB |
최종일 | 1929년 10월 6일 |
최종 팀 | 보스턴 브레이브스 |
선수 | 시카고 오펀스 / 컵스 (1902–1913) 보스턴 브레이브스 (1914–1917) 필라델피아 필리스 (1917) 시카고 화이트삭스 (1922) 보스턴 브레이브스 (1929) |
감독 경력 | |
감독 | 시카고 컵스 (1913, 1921) 시카고 화이트삭스 (1924) |
통계 | |
리그 | MLB |
타율 | 0.270 |
홈런 | 12 |
타점 | 538 |
도루 | 324 |
수상 및 업적 | |
하이라이트 | 3× 월드 시리즈 우승 (1907, 1908, 1914) NL MVP (1914) 시카고 컵스 명예의 전당 |
명예의 전당 링크 | 국립 야구 명예의 전당 및 박물관 |
명예의 전당 유형 | 국가 |
명예의 전당 입성 년도 | 1946 |
명예의 전당 입성 방법 | 올드 타이머 위원회 |
신체 정보 | |
신장 | 175 cm |
체중 | 57 kg |
2. 어린 시절
뉴욕주 트로이에서 태어났다.[59] 그의 부친은 술집 주인으로 일하였다.[1] 에버스의 부친, 형제, 삼촌을 포함한 많은 그의 일가는 야구를 하였다.[1] 에버스는 트로이에 있는 세인트 조셉 초등학교에 다녔고, 트로이에서 길거리 야구를 했다.[1][34]
1902년 시카고 컵스에서 데뷔한 에버스는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인 수비를 인정받아 주전 내야수로 자리 잡았다. 1906년부터 컵스는 리그 3연패와 월드 시리즈 2회 우승을 달성했다.
3. 선수 경력
당시 컵스 내야진(유격수 조 티커, 2루수 조니 에버스, 1루수 프랭크 찬스)의 병살 플레이는 "Tinker to Evers to Chance"라는 구절로 유명해졌다.
9월 23일,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에버스는 9회말 2사 1, 3루 상황에서 프레드 마클의 주루 미스를 지적하는 어필 플레이를 성공시켰다. 이로 인해 경기는 재경기로 이어졌고, 컵스는 결국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14년 보스턴으로 이적한 에버스는 최고 수비율을 기록하며 리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선수로서의 실질적인 활동은 1917년까지였으며,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감독,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스카우트 및 영업 지배인, 마이너 리그 감독 등을 역임했다.
3. 1. 마이너 리그 경력
에버스는 1902년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의 B등급 뉴욕주 리그에 속한 트로이 트로전스에서 유격수로 프로 데뷔했다. 에버스는 100lbs 미만의 몸무게로 알려졌고, 상대 팬들은 그가 코미디 공연의 일부라고 생각했다.[59] 에버스는 선수 생활 동안 130lbs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2]
에버스는 타율 .258을 기록했고, 10개의 홈런으로 뉴욕주 리그를 이끌었다.[59] 시카고 컵스의 감독인 프랭크 실리는 에버스의 팀 동료 투수 알렉스 하디를 스카우트했다. 실리는 주전 2루수인 바비 로우의 부상으로 인해 2루수를 찾고 있었기에,[35] 하디와 에버스의 계약을 1500USD에 구매했다. 트로전스는 에버스의 성질 때문에 그의 서비스를 기꺼이 팔려고 했다.
3. 2. 시카고 컵스 (1902-1913)
에버스는 1902년 B등급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의 뉴욕주 리그에 속한 트로이 트로전스에서 유격수로 프로 데뷔했다. 에버스는 100lbs 미만의 몸무게로 알려졌고, 상대 팬들은 그가 코미디 공연의 일부라고 생각했다.[59] 에버스는 선수 생활 동안 130lbs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2]
에버스는 타율 .285를 기록했고, 10개의 홈런으로 뉴욕주 리그를 이끌었다.[59] 시카고 컵스의 감독인 프랭크 실리는 에버스의 팀 동료 투수 알렉스 하디를 스카우트했다. 실리는 주전 2루수인 바비 로우의 부상으로 인해 2루수를 찾고 있었기에,[35] 하디와 에버스의 계약을 1500USD에 구매했다. 트로전스는 에버스의 성질 때문에 그의 서비스를 기꺼이 팔려고 했다.
에버스는 9월 1일 컵스와 함께 자신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데뷔를 하였는데, 실리 감독이 조 팅커를 유격수에서 3루수로 옮기면서였다. 내셔널 리그에서 단 3명의 선수들은 에버스보다 어렸으며 짐 세인트 브레인, 지미 세브링과 레이브 윈햄이었다.[3] 3일 후에 실리는 팅커를 유격수로 돌려 보냈고, 에버스를 2루수로 선임하였다. 컵스에서 한 달 동안 실력 시험에서 에버스는 장타를 기록하지 않으면서 .222 점을 타구하고 일치하지 않은 수비를 맡았다.[59] 1903년 시즌 동안 로우는 회복되었으나 에버스의 강한 활약은 로우를 불필요하게 만들었으며, 에버스는 2루수들 중에 수비율(.937)에서 내셔널 리그 3위를 하고 보살(245)과 척살(306)에서 5위를 하였다.[4] 컵스는 시즌 후에 로우를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팔았다.[5] 에버스는 1904년 시즌에 152경기에 출전하였다.[59] 그의 54개의 실책이 내셔널 리그 2루수들을 이끌었어도, 518개의 보살과 381개의 척살은 내셔널 리그를 이끌었다.[6]
1906년 시즌 동안 에버스는 49개의 도루로 내셔널 리그에서 5위를 하였고,[7] 344개의 척살과 함께 리그를 이끌었으며 44개의 실책으로 모든 2루수들을 이끌었다.[8] 컵스는 그해 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우승하였으나 시카고 화이트삭스에게 월드 시리즈를 4 대 2로 패하였고, 에버스는 시리즈에서 20타수 3안타(.150)를 타구하였다.[9] 1907년 시즌 동안 에버스는 500개의 보살로 내셔널 리그를 이끌었다.[10] 컵스는 그해 내셔널 리그의 챔피언으로서 다시 우승하였고, 에버스가 20타수 7안타(.350)를 타구하면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4 대 0으로 월드 시리즈를 우승하였다.
1908년 페넌트 경주가 열리는 동안 에버스는 뉴욕 자이언츠를 상대로 경기에서 "메르클의 보너"로 알려진 프레드 머클의 주자 실책에 심판들을 경고하였다. 1루에 주자인 머클이 2루를 도달하지 않으면서 갱의실로 간 동안 알 브리드웰은 자이언츠를 위하여 경기를 우승하는 것으로 나온 1루타를 쳤다. 에버스는 공을 요구하였고, 심판은 머클을 아웃으로 판결을 내렸다.[59] 컵스는 그러고나서 에버스가 다시 20타수 7안타(.350)를 타구하면서 타이거스에 4 대 1로 1908년 월드 시리즈를 우승하였다. 그해 시즌을 위하여 에버스는 내셔널 리그에서 5위를 위하여 좋은 .300의 타구 평균과 호너스 와그너 만에 밀려 2위를 한 .402의 출루율을 가졌다.[13]
1910년 시즌 동안 에버스는 108개의 볼넷을 뽑아 밀러 허긴스 만을 추적하였다.[14] 하지만 에버스는 다리가 부러지면서 시즌의 말기를 놓쳤다.[15] 에버스 없이 컵스는 내셔널 리그 페넌트를 우승하였으나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에게 1910년 월드 시리즈를 4 대 1로 패하였다. 에버스는 컵스의 감독 프랭크 챈스의 반대에 불구하고 1911년 대학 야구 팀 네이비 미드쉽멘을 감독하였다.[17] 그는 그해 신경 쇠약을 경험하여 시즌 후반에 컵스로 돌아와 그해 46개 만의 경기를 활약하였다.[59][18] 에버스는 이 일이 자신의 저축의 대부분을 자신에게 비용을 들인 비지니스 거래의 결과였다고 지적하였다.[59] 에버스는 1912년 내셔널 리그에서 4위를 위하여 좋은 .341 점을 타구하는 데 돌이키고, .431의 출루율과 내셔널 리그를 이끌었다.[59] 팀의 소유자 찰스 W. 머피는 에버스를 1913년 컵스의 감독으로 임명하여 그를 5년 계약으로 맺어 챈스의 뒤를 이었다.
3. 3. 보스턴 브레이브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 (1914-1917)
1913년 시즌 후, 에버스는 페더럴 리그로 이적하면 100000USD를 제안받았지만, 컵스에 남기 위해 더 적은 돈을 받기로 결정했다.[20] 1914년 2월, 에버스가 선수들과 계약을 체결한 후, 머피는 에버스를 감독에서 해고하고 빌 스위니와 허브 퍼듀를 대가로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했다.[20] 머피는 에버스가 감독직에서 사임했다고 주장했지만, 에버스는 이를 부인했다. 에버스는 자신이 자유 계약 선수라고 주장했지만,[21] 리그는 그를 브레이브스로 배정했다.[20] 그는 시즌당 10000USD에 4년 계약을 체결했고, 계약금은 20000USD였다.[22]
1914년 시즌 동안 브레이브스는 7월 4일까지 8개 팀으로 구성된 내셔널 리그(NL)에서 최하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브레이브스는 시즌 마지막 10주 동안 최하위에서 반등하여 NL 우승을 차지했다.[2] 에버스의 0.976의 수비율은 모든 NL 2루수들 중 최고였다.[23] 브레이브스는 1914년 월드 시리즈에서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를 4대 0으로 꺾었으며,[24] 에버스는 16타수 7안타(.438)를 기록했다.[25] 에버스는 팀 동료인 래빗 마란빌을 제치고 현대 최우수 선수상의 전신인 찰머스 상을 수상했다.[59][26]
에버스는 1915년 부상으로 제한을 받았으며, 심판과 언쟁을 벌여 출장 정지를 받기도 했다.[59] 1916년 부진한 시즌을 보낸 후, 에버스는 1917년 시즌을 .193의 타율로 시작했다.[59] 에버스의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브레이브스는 시즌 중반에 에버스를 웨이버 명단에 올렸고,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그를 영입했다.[59] 그 시즌 오프에서 에버스는 인터내셔널 리그의 저지 시티 스키터스 감독직 제안을 거절했다.[28]
3. 4. 보스턴 레드삭스와 이후 선수 경력 (1918-1929)
에 보스턴으로 이적, 타율은 .279였지만 최고 수비율을 기록, 리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선수로서의 실질적인 활동은 1917년까지였고, 이후 에 화이트삭스의 감독을 맡았으며, 은퇴는 이다. 그 후에는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스카우트 및 영업 지배인, 마이너 리그 감독 등을 역임했다.[2]
4. 코치와 감독 경력
에버스는 1920년 뉴욕 자이언츠에 코치로 합류했다.[30][31] 1921년에는 시카고 컵스 감독을 맡아 프레드 미첼의 뒤를 이었으나, 팀 부진으로 8월에 해고되어 빌 킬리퍼로 교체되었다.[32] 컵스는 그 시즌 내셔널 리그 8개 팀 중 7위에 그쳤다.[2]
1922년과 1923년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코치를 맡았다.[2] 1922년에는 부상당한 에디 콜린스를 대신해 2루수로 한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33]
1924년 시즌에는 화이트삭스의 임시 감독을 맡았는데, 정식 감독이었던 프랭크 챈스가 건강 문제로 시즌 초반 팀을 떠났기 때문이다.[34] 하지만 에버스 역시 충수염으로 시즌 중 팀을 이탈했고,[35] 9월에 챈스가 사망하면서 화이트삭스는 새 감독을 물색했다.[36] 시즌 후 화이트삭스는 에버스를 콜린스로 교체했다.[37]
이후 에버스는 스카우트로 보스턴 브레이브스에 합류했다.[2] 1929년 브레이브스 구단주 에밀 푹스는 로저스 혼즈비 감독을 컵스로 보내고 자신이 직접 감독을 맡으면서 에버스를 코치로 임명했다. 푹스는 현장 경험이 부족했기에,[38] 에버스가 브레이브스의 주장 역할을 맡아 경기 중 팀을 이끌고 심판과 소통했다.[39] 1929년 10월 6일에는 동료 코치 행 고디와 함께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40] 이로써 에버스는 그해 리그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41]
에버스는 1930년 푹스의 뒤를 이어 감독이 된 빌 맥케치니 아래에서도 브레이브스 코치로 1932년까지 활동했다. 이후에도 브레이브스 스카우트로 일했으며,[42] 1935년에는 뉴욕-펜실베이니아 리그 올버니 세너터스의 단장을 맡았으나,[43][44] 시즌 말 사임했다.[45]
4. 1. 감독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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